장엄한 선율… 청중 공감대 이끌어
지금도 송정동에 가면 어릴 때인 60년대가 생각난다. 평동에 있던 외가에 가면서 가끔 지나던 송정동은 당시 제법 번화했던 곳으로, 오래된 일본식 건물들과 조그만 골목길의 작고 화려한 상점들이 어우러져서 독특한 분위기를 풍겨냈었다.
오랜만에 찾아간 송정동의 뒷골목은 아련한 어릴 때의 향수를 자극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좁은 골목은 변하지 않았고, 지난 몇 십년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듯 나무그늘에서 한담을 나누고 있는 소박한 노인들도 여전했다.
대도시의 세련되면서도 삭막한 감성과는 사뭇 다른 어떤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그 동네 한가운에 광 잡고 있었다.
광주여성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패밀리 콘서트’라는 다정한 이름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광주시, 광주문화재단의 후원으로 공연장상주단체 육성지원사업의 광산해피콘서트 첫시리즈인 제 31회 정기연주회를 지난 5월12일 그곳에서 열었다. 화창한 일요일 오후 음악회장을 찾은 가족들은 연주가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행복한 표정들이었다. 광산구와 광주여성필이 지난 몇 번의 연주를 통해 노력한 덕분인지, 주민들은 클래식 음악회에 오는 것을 낯설어하지 않는 것 같았고, 익숙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한 나라의 장래는 그 나라의 문화적 투자 여하에 달려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지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광산구의 문화적 투자와 노력을 보면서 나는 그곳의 밝은 미래를 떠올릴 수 있었다. 마침 광산문화예술회관에 그동안 소원했던 새 연주용 그랜드피아노가 도착해서 그날 관객들에게 첫 선을 보이게 되었다고 구청장 이하 관계자들이 모두 상기된 모습이었다.
광주여성필과 객원지휘자 양일오는 먼저 몇 곡의 아름다운 곡들을 연주하며 청중들과 공감대를 형성했고, 곧 이어서 무대를 꽉 채우는 거대한 피아노가 오케스트라 앞쪽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이 피아노의 첫 사운드를 모두에게 려기 해 특별히 초청된 피아니스트 박규연(군산대 교수)은 장엄하고 화려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를 연주했다.
수많은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도 대곡에 속하는 베토벤의 ‘황제’는 축제와 같던 그날의 분위기를 최고로 끌어올렸다. 첫 소절의 담대한 패시지(passage)를 통해 시작부터 청중을 압도한 박규연은 시종 명쾌하고 안정된 톤으로 일관하면서 설득력 있게 연주했고, 오케스트라나 지휘자와의 호흡도 노련했다. 많은 스케줄 속에서도 주최 측의 갑작스런 초청에 흔쾌히 응하고 성실하게 연주하는 그의 모습에서 오랜만에 순수하고 진정한 예술가를 만난 듯 신선했다.
전반적인 기획과 음악회의 프로그램 선정을 보면서 이미 어느 정도의 성공적인 연주회를 예감하긴 했지만, 광주여성필의 연주도 지난 몇 년 동안 크게 성장했다는 것을 끼에 분했. 단 개개의 소리에서는 자신감이 묻어났고 향상된 역량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지휘자와의 소통이나 단원들 서로간의 일체감에는 아직 아쉬움이 좀 남는다. 같은 단원들끼리 긴 세월을 함께한 전통 있는 오케스트라가 갖는 깊은 맛이 아직은 없다는 뜻이다. 이제는 좀 더 높은 음악적 목표를 가지고 멀리 세계를 바라보면서 나아가길 나는 광주여성필에 벌써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연주 후 만난 광주여성필의 김유정 단장은 준비과정의 어려웠던 일들은 다 잊어버린 듯 여전히 의욕에 차 있었다. 광주여성필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보았다.
2013. 5. 14
광일보